MESSAGE
뒤흔드는 것
T

시목은수




영은수. 시목은 그 이름을 곱씹는다. 영은수. 혀는 부드럽고 글자에는 각진 곳이 없다. 시목은 그게 좀 은수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복도는 조용했다. 그는 1인용 병실의 이름표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것을 멈추고 발길을 돌렸다.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황 검사. 은수의 모친이었다. 시목은 돌아서서 목례를 했다. 또 그냥 가요? 잠깐 앉았다가지. 괜찮습니다. 그는 불투명한 창 너머를 잠깐 보다가 다시 목례를 했다.



은수는 한달 뒤에 깨어났다. 동료 검사들과 용산서 경찰들이 차례로 문병을 왔다. 여진은 과일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 은수의 손을 붙잡았다. 거기서 더 마르면 어떡해요, 검사님. 은수는 다정한 말투에 처음으로 웃었다.


황 검사님은 왔다 갔어요?

아니요.

아직 안왔어요?

네.


목소리가 작아졌다. 여진은 말을 잘못 꺼냈다고 생각했다. 황 검사님이 요새 좀 바쁘다고 들었어요. 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체념도 수긍도 아니었다. 은수는 기대하지 않았으므로 실망도 없었다. 그렇다고 믿었다.



사람이 빠진 병실에서 은수가 주로 하는 일은 창 밖을 내다보는 것이었다. 사실 깨어난 후로 줄곧 현실감각이 없었다. 치열하게 쫒던 모든 게 잠들어있던 한달 사이 끝났다. 다행히 이번에는 적응할 시간이 있었다. 은수는 베개 밑에 숨겨두었던 신문을 꺼내 1면부터 다시 읽었다. 자신이 아는 이창준과 신문 속 이창준을 비교하면서.



시목은 며칠이 더 지나서 찾아왔다. 은수가 깨어나고 정확히 열흘 째였다. 그는 은수의 등에 매달린 허무를 발견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선배 남해로 발령받았다면서요.

응. 몸은 좀 어때.

괜찮아요.


잠시동안 둘은 그저 마주보고 있었다. 은수는 시목의 눈동자에서 무언갈 찾으려는 사람처럼 지긋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저는 괜찮은데 선배는 안 괜찮아보이네요. 시목은 그제야 발을 뗐다. 그가 간이의자로 다가가자 은수가 침대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시목은 은수의 옆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았다.


선배.

어.


은수는 창준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다. 선배가 있었다면서요, 그 사람의 마지막에. 그러나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다물었다. 목구멍이 까끌까끌했다.


은수마저 침묵하자 공기가 고요해졌다. 시목은 은수의 시선을 따라 창 밖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헐렁한 환자복 아래로 마른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목에 생긴 흉터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시목은 문득 가슴이 지끈거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은수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은수는 계속 침묵했다.


영은수.


시목은 머뭇거리다가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은수는 멍한 얼굴로 제 뺨을 더듬는다. 울고 있다는 감각이 뒤늦게 찾아왔다. 은수는 손수건을 받아 무릎에 얹어놓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저 너무 무서웠어요. 그 한마디에 시목은 아득해진다. 처음 겪는 고통이 그를 잠식했다.


깜깜하고, 무섭고…….

…….

피가, 피가 너무 많이 나서… 너무 뜨거운데 차가워서…….

알아. 그만 생각 해.


그때를 떠올리는 건 시목에게도 어려웠다. 그는 그 순간의 공포를 기억한다. 피웅덩이 위로 쓰러진 영은수. 숨은 미약하고 박동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시목은 그때 그가 아는 최악의 결말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은수가 수술대에 누워있는 내내 낯선 공포에 붙들렸다.


침을 삼킨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은수는 다시 침묵했다.


잠시 후 시목은 자켓을 벗어 잘게 떠는 은수의 등에 얹었다. 미안해. 은수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 영은수에게 필요한 것이 위로인지 사과인지도 불분명했다. 그러나 시목은 다시 말했다. 미안해.


은수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눈은 여전히 젖어있었다.


제가 칼에 찔리면서 제일 먼저 누굴 생각했는 줄 아세요?

…….

선배였어요. 웃기죠. 그렇게 무시당해놓고…


시목에게 죄책감을 종용하는 말투는 아니었으나 가슴께가 뻐근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뱉었다. 눈밑이 좀 뜨거웠다. 시목은 손을 뻗어 흘러내린 자켓을 목 가까이 끌어올렸다.


내일 또 올게.



은수는 시목의 자켓을 걸친 채로 창가에 섰다. 주차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시목은 차에 올라타기 직전에 은수가 서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은 오래 머물렀다. 사람의 눈동자에는 언어보다 더 많은 언어가 있다는 말을 그제야 이해한다. 은수가 돌아섰다. 시목은 시동을 걸면서 영은수의 축축하고 무거운 속눈썹에 대해서 생각했다. 부드럽고 강한 것. 각진 곳 없이 단단한 것. 단단하게 그를 뒤흔드는 것……



약속대로 시목은 다음날에도 은수를 찾아왔다. 은수는 그게 좀 원망스러웠다. 약속을 왜 지켜요, 사람 기대하게. 선배는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시목은 대꾸가 없었다. 그래서 은수 또한 분노를 그만뒀다. 어차피 다 끝났으니까. 시목은 은수가 또다시 허무를 뒤집어쓰기 전에 자켓을 벗었다. 등 위로 내려앉는 무게를 느끼며 은수가 눈을 깜박인다.


선배.

어.

내일도 올거에요?

어.


은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다만 자켓의 소매를 잡아당겨 상체를 더 파묻고 시목을 쳐다보았다. 눈은 더이상 젖어있지 않았지만 시목은 여전히 흔들림을 느꼈다. 그는 영은수가 이것만은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