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SSAGE
꿈의 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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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찰스는 또 고개를 꾸벅이며 졸았다. 기면증에라도 걸린 사람 같았다. 창밖을 보다가, 책상 앞에 앉아있다가, 심지어는 수업 도중에도 잠이 들었다. 아이들이 교수님, 교수님 부르며 깨워도 못듣다가 행크가 다가와 찰스, 하고 어깨를 흔들면 그때서야 눈을 꿈벅인다. 행크는 식사도 거르고 잠을 자는 찰스를 걱정했다. 꼭 어딘가로 사라져버릴 것 같다고. 그럼 찰스는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소리내어 웃었다. 내가 가긴 어딜 가. 그렇지만 행크는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찰스가 그곳에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1.

 교수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의외로 로건이었다. 로건은 한달에 한 번 짧게 들르는 것이 전부였음에도 찰스에 대한 건 거의 알았다. 언제 말할 생각이었어? 로건이 물었다. 부리부리하게 뜬 눈 앞에서 거짓말은 이미 소용이 없다. 찰스는 로건과 있으면 서투른 어린애가 되었다. 


언제 말할 생각이었냐고.

으음, 글쎄.

찰리.


 그를 찰리라고 부르는 사람은 로건 뿐이다. 찰스는 그 애칭이 마음에 들었다. 그 전까진 누구도 찰스를 애칭으로 불러준 적이 없다.


사실 나도 얼마전에 알았어.

.......

어젯밤에는 꿈에 에릭이 나왔거든. 그런적은 별로 없는데. 그렇게 푹 잔것도, 꿈을 꾼 것도 오랜만이었어.


 마치 오래된 흑백 영화같은 꿈이었다. 발 아래에서 파도가 쳤으나 소리는 나지 않았다. 꿈을 꾸는 내내 에릭은 입만 뻐끔거리며 목소리를 잃은 인어처럼 굴었다. 어쩌면 그 목소리를 뺏은 것이 찰스,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팔을 벌리자 철골처럼 무겁고 단단한 품이 그 사이로 들어와 찰스를 마주안았다. 등을 쓰다듬는 손바닥. 그 다정함과 안락함….


 기억의 서랍을 닫고 고개를 들자, 로건이 진실을 탐색하는 눈으로 찰스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머뭇거리다가 찰스와 눈높이를 맞추어 앉는다. 잠은 언제부터 못 잔거야? 남자는 맹수의 낯을 하고서 누구보다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손바닥을 감싸는 온기가 여름의 모래사장처럼 뜨겁다. 찰스는 대답 없이 로건의 손등 위에 뺨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2.

 기억할 수 없을만큼 오랫동안 불면에 시달린 남자는 다독이는 손길 몇 번에 금방 잠이 들었다. 로건은 꿇어 앉은 무릎이 저려오는 것도 모르고 찰스의 곁을 지켰다. 



3.

 로건은 남들보다 긴 수명을 살아오면서 많은 죽음을 보았다. 그가 땅으로 돌려보낸 목숨도 여럿 되었다. 불사의 남자에게 죽음이란 가까우면서도 멀리 있는 위성같은 존재다. 그러나 부쩍 수척해진 얼굴의 찰스를 마주보았을 때만큼 죽음이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 


 교수, 당신은 모르겠지. 목숨에도 무게는 있어. 어떤 사람은 종잇장보다도 가볍고 어떤 사람은 행성보다도 무겁지. 당신은 그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생명이야. 그 조그만 뇌 속에 수많은 삶이 있으니까.


 그 수많은 삶들이 뇌를 좀먹고 있어 정작 찰스가 설 자리는 한 뼘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알아서 로건은 차라리 그림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무게를 줄이고 면적을 넓혀 바닥에 검게 눌러붙는다. 그가 발 아래서 찰스를 붙잡아둔다면 지금보다 오래버틸 수 있을런지도 몰랐다. 


 에릭 렌셔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니, 어떻게 할까?


 그는 잠이 든 찰스를 내려다보다가 손바닥을 들어 그의 두 눈과 이마의 경계에 걸치듯 얹는다. 그렇게하면 마치 꿈을 훔쳐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4.

 그즈음 매그니토는 바빴다.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가늠해 저울에 올려두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학교에 다녀올게. 레이븐은 어느날 그렇게 통보하고는 훌쩍 떠났다. 그 빈자리를 채워야했으므로 에릭은 더 바빠졌다.


찰스가 아프대.


 떠났을 때만큼이나 불쑥 돌아온 레이븐이 말했다. 에릭은 피곤한 눈두덩이를 꾹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은 껌껌했고 레이븐은 불도 켜지 않은 채로 울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죽을지도 모른대. 


 레이븐은 반은 파란 몸, 또 반은 처음보는 남자의 모습을 하고서 소리내어 울었다. 형태를 알 수 없던 불안이 커다란 산의 모습으로 그녀를 누르고 있다. 그 그림자가 발치에 닿기 무섭게, 에릭은 달도 뜨지 않은 밤 속을 날았다. 중심을 잃어 땅으로 곤두박질칠 뻔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찰스. 머릿속으론 연신 그 이름을 부른다. 찰스, 대답해.


찰스. 제발.


 에릭은 고통스러운 정적을 느낀다. 



5.

 탁상등의 불빛에 기대있던 찰스가 눈을 뜬다. 좀전까지 머리맡을 지키던 로건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벽에 어룽진 그림자 아래로 그를 쳐다보는 눈빛이 있다. 형형하게 타오르는 청녹색의 불꽃.


 찰스는 또다시 꿈을 꾼다고 생각한다. 팔을 벌리고 찬기운이 도는 몸을 끌어안는다. 뺨에 까끌한 수염이 와닿는 감촉이 선명했다. 세상이 기우뚱 기우는가 싶더니 찰스는 어느새 침대 위에 누워있다. 에릭은 밤공기가 묻은 손바닥을 찰스의 옷 안으로 밀어넣으며 고개를 숙였다. 판판하게 마른 뱃거죽 속의 장기를 어루만지고 미약한 박동을 확인한다.


미스틱이 이상한 말을 했어.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순간 찰스는 이것이 현실임을 자각하며 어둠 속의 윤곽을 더듬는다. 에릭이 자신의 표정을 볼 수 없는게 다행이었다. 


레이븐이 악몽을 꿨나봐.

찰스.

아니면 자네가 악몽을 꿨거나.

날 바보 취급 하는건가?

 

 수많은 말들이 혀끝에서 멈췄다. 눈가가 뜨거워지고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에릭은 이것을 분노라고 여겼다. 그것외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는 바싹 마른 찰스의 손가락을 쥐고 제 관자놀이를 눌렀다. 찰스, 내 머릿속에 들어와. 지금 내 생각을 읽어. 우리의 영혼을 맞부딪히고 감정을 공유하는거야. 그동안 나는 신에게 기도를 하겠네. 자네의 목숨을 나에게 달라고. 차라리 우리를 태초의 모습처럼 하나로 만들어달라고…….



6.

 찰스의 들썩이는 가슴 위로 고개가 떨어졌다. 방 안에는 탁상등의 미미한 불빛이 전부였기 때문에 모든게 흑백으로 보였다. 에릭, 이건 꿈이야. 우린 꿈 속에 있는거야. 찰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에릭의 뺨을 잡고 입을 맞췄다. 팔다리가 달린 꿈이 그를 족쇄처럼 끌어안는다. 잔뜩 젖은 얼굴이 어린 짐승처럼 가련했다. 천천히, 에릭의 속에서 치받은 열이 찰스에게로 번져간다. 살갗이 녹을 것처럼 뜨겁다. 찰스는 온 몸을 어루만지는 꿈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